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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 박춘건
  • Apr 05, 2006
  • 3461
[문화산책―이주엽] 멋지게 지는 법  

“나는 연방대법원의 판결에 결코 동의하지 않지만 그 판결을 받아들인다. 오늘밤 우리 국민의 단결과 우리 민주주의의 역량 강화를 위해 나는 양보를 선언한다.”

미국 정치학도들 사이에서 가장 뛰어난 문장 중의 하나로 꼽히는 앨 고어의 2000년 대선 패배 연설문은 이렇게 말문을 연다.

사상 유례없는 법정 공방 끝에 득표에서 이기고도 선거에선 진 고어는 고통스런 패배의 감정을 치욕이 아닌 우아한 승복으로 승화했다. 그가 직접 작성했다는 연설문은 군더더기 하나 없는 가장 경제적인 언어로 이뤄져 있으며,솔직함이 주는 감동을 최대치로 선사한다. 명문의 조건은 화려한 수사가 아니라 명징한 정신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는 감정을 과장하지도,애써 숨기지도 않는다. “우리는 새 대통령을 중심으로 뭉칠 것이다. 그러나 한가지 유감이 있다. 내가 앞으로 4년 동안 미국인들을 위해 일하고 싸울 기회를 얻지 못한 것이 유감이다.” 이 당당한 자기고백은 잘 훈련받은 정신의 기품이 어떤 것인지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웅변한다. “패배에 따른 손실이 아무리 클지라도,패배 역시 승리만큼이나 인간의 영혼을 새롭게 하고 영광을 가져오는데 이바지할 수 있다.” 이 순간 고어는 세계인에게 아름다운 패배의 양식을 가르치는 정신적 교사이자,패배의 새로운 감수성을 보여주는 시인으로 거듭났다.

뉴욕 타임스의 칼럼니스트 토머스 프리드만은 “만약 중국이나 러시아 스파이가 워싱턴에서 훔칠 가장 값진 비밀을 찾는다면 여기 공짜 정보가 있다. 바로 고어의 연설문이 그것이다”고 흥분했을 정도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1992년 대선 패배후 “제 부덕의 소치며,국민 여러분께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며 정계은퇴를 선언했고 이회창씨 또한 2002년 대선 패배후 “제가 불민하고 부덕한 탓이며,국민 여러분에게 엎드려 용서를 빈다”고 판에 박은 듯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이들의 패배 연설엔 진솔한 개인은 없고 가부장적이고 전근대적인 봉건 영주의 모습만 있다. 우리 정치인들은 자신의 감정을 과장없이 그대로 들여다 보는 것에 이처럼 서툴다.

이와 달리 최근 우리나라 두 스포츠 감독이 전한 패배의 변은 매우 우아하다. WBC 준결승에서 일본에 졌던 김인식 감독은 “일본 투수가 정말 잘 던졌다. 일본은 이번 대회 팀 가운데 가장 짜임새가 있는 강팀”이라며 상대팀에 경의를 아끼지 않았다. 지고도 덕장다운 정신의 관록과 여유를 잃지 않았다.

남자배구 ‘삼성 천하’를 9년간 누리다 현대에 왕좌를 내준 신치용 감독은 경기가 끝난 뒤 “섭섭하다기보다 오히려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기분이다. 신진식 김세진 등 노장들과 소주라도 한잔 해야겠다”며 마치 패배의 순간을 기다린 사람처럼 말했다. 그는 패했지만 여전히 일류 감독이라는 생각이 든다. 패배에 저항하지 않고 패배와 품위있게 화해하는 모습은 멋지다.

이제 선거철이다. 죽기살기로 싸우겠지만 모든 후보가 이길 수는 없다. 그러므로 후보들 모두 승리의 샴페인보다 우아한 패배 연설문 하나 정도는 미리 만들어두는 게 좋겠다. 패자의 아름다운 뒷모습은 승자의 환희보다 더 여운이 크고 길다.

생각해보라. 승승장구하는 인생은 과연 몇이나 되는가. 인생은 이기는 것보다 지는 일이 다반사다. 당신은 멋지게 질 준비가 되어 있는가. 그리고 우아하고 세련된 걸음으로 퇴장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당신이 던질 마지막 패배 연설문은 무엇인가.

이주엽(대중음악기획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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